한강철교

한강철교는 1900년 경인선 열차 운행을 위해 완공된 한강 최초의 다리이자,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근대식 대형 토목공사로, 이후 일제 강점기·한국전쟁·산업화기를 거치며 여러 차례 증설·폭파·복구를 반복해 온 교량이다.wikipedia+3

건설 배경과 국내 최초 근대 교량

한강철교의 기원은 경인철도 부설권과 한강다리 부설권을 함께 얻은 미국인 사업가 제임스 모스에게서 시작된다. 1896년 모스가 특허를 취득한 뒤 1897년 경인선 공사가 착공되었고, 인천–노량진 간 열차를 서울 도심까지 연장하기 위해 한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반드시 필요해졌다. 이후 일본이 철도·교량 건설권을 인수하면서 설계·시공 주도권은 일본 측으로 넘어갔고, 보행용 인도부(보도교) 계획은 공사비를 이유로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00년 7월 5일 단선 철교인 제1철도교(A선)가 준공되었고, 이 다리로 인해 경인선은 노량진에서 끊기던 노선에서 용산·경성(서대문)까지 이어지는 완전한 도시 철도망으로 탈바꿈했다.encykorea.aks.ac+3

당시 한강철교 건설은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규모의 근대식 토목공사였다. 미·일 자본과 서구 공법이 도입되면서 대량의 철강재·석재·콘크리트가 사용되었고, 수많은 인부가 한강 모래벌로 모여 공사에 투입되었다. 이 공사는 용산과 노량진 일대의 공간 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한강 남북을 잇는 첫 상시 교통축이 형성되면서 “한반도의 교통혁명”으로 비유될 만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 이전까지는 나루터와 배에 의존하던 한강 도하가 철도라는 규칙적인 교통수단으로 대체되면서, 서울–인천–내륙을 잇는 물류·여객 체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news.seoul.go+2

증설: 제2·제3철도교와 교통량 증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자 한강철교의 수송량은 급증했고, 단선 교량만으로는 확대되는 열차 운행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1911년 상류 측에 제2철도교(B선) 공사가 시작되어 1912년 9월 준공되었고, 이로써 한강철교 구간은 복선 운행이 가능해졌다. 이후 1913년에는 강재 거더를 교체하고 일부 교각을 개축해 구조 강도를 보강했으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일부 축대가 유실되자 교량 구조물을 1m 가량 높이는 개축이 이루어졌다.wikipedia+2

교통량 증가는 일제의 식민지 개발정책과도 맞물린다. 경부선·경인선이 군수·물자 수송의 동맥으로 쓰이면서, 한강철교는 식민지 수탈과 군사 지배의 핵심 인프라로 활용되었다. 1944년에는 상류 쪽에 제3철도교(C선)이 추가 건설되어 총 3선 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이때까지 한강철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철도 교량 중 하나로 기능했다. 제1·2·3철도교는 각각 A·B·C선으로 불리며, 이후 경부선·수도권 전철 1호선 열차가 이 중 일부 선로를 사용하게 된다.encykorea.aks.ac+1

한국전쟁과 폭파·복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방어선의 마지막 보루는 한강이 되었고, 6월 28일 새벽 대한민국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폭파는 작전상 미숙과 정보 혼선으로 민간인 대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진행되어 큰 인명 피해를 낳았고, 이는 ‘한강교 폭파사건’으로 한국전쟁 초기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다.kroad.or+4

한강철교의 경우 인도교와 달리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아 일부 교각과 교대만 손상되는 수준에 그쳤다. 북한군은 손상된 구간에 임시 도섭판을 설치해 T-34 전차와 병력을 영등포 방면으로 통과시켰고, 이후 미 공군 공습까지 더해지면서 교량은 전쟁 내내 수차례 파손과 응급 복구를 반복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세 개의 철도교는 상당 기간 파손 상태와 임시 가설 구조로 남아 있었고, 본격적인 복구는 1950년대 후반에 이뤄진다.namu+4

1957년 제3철도교(C선)가 먼저 복구되어 사용이 재개되었고, 1969년에는 제1·제2철도교(A·B선)가 재건되어 오늘날과 유사한 3개 철교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94년에는 추가 선로·교량이 건설되어, 한강철교 일대는 복수의 철교가 병렬로 놓인 대규모 철도 교차 지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량 상부 구조는 여러 차례 교체·보강되었지만, 기본적인 축선과 교각 일부는 20세기 초 공사의 흔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news.seoul.go+2

도시·교통사적 의미

한강철교는 공학사·도시사·전쟁사를 동시에 압축한 상징적인 구조물로 평가된다. 공학사 측면에서는 국내 최초의 근대식 대형 교량이자, 서구식 강재 거더와 교각 설계, 홍수·유빙을 고려한 기초 공법이 처음 적용된 현장으로, 이후 한강대교(한강인도교)와 한반도 각지 교량 건설의 기술적 출발점이 되었다. 도시사적으로는 용산·노량진 일대에 대규모 인력과 자원을 끌어들이며 주변 마을을 도시화했고, 서울과 인천, 나아가 경부선 축 상의 도시들을 하나의 교통 체계로 묶어 수도권의 공간 구조를 재편하는 역할을 했다.naver+4

전쟁사·근현대사적으로는 일제 강점기 군수 수송의 도구이자 한국전쟁의 격전과 한강교 폭파 사건을 겪은 장소로, 식민·전쟁·분단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상징적 무대다. 오늘날 한강철교는 경부선·수도권 전철 1호선 열차가 지나는 철도 전용 교량으로서 일상적인 통근·통행의 일부가 되었지만, 그 아래 흐르는 한강과 교각의 연대기는 1900년대 초 “한강 최초의 다리”가 놓이던 순간부터 현재까지 120년 넘는 시간의 변화를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encykorea.aks.ac+8